2021. 11. 23. 12:47ㆍ무한취미/독서
이 책을 이야기하려는 오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단 한마디의 사과도 없이. 결국엔.
듣기만해도 속이 답답해지는 이야기를
책은 부드럽고 상세하게 펴낸다.
작가의 힘, 소설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요새 정치인의 발언으로 5월의 광주 이야기가
언론에 회자되던데,
이 사건을 편향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나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꼭 추천해주고 싶은 책 중 하나다.
진심이 느껴져서.
네가 죽은 뒤에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엇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일곱개의 뺨 102p-
동호와 정대는 같은 중학교 친구이다.
정대의 누나인 정미와 정대는 동호네 사랑채에 세들어 산다.
정미는 정대를 열심히 가르치고 돈을 벌어 나중에
꼭 학교에 가서 공부해보는 것이 소원인 미싱공장 여공이다.
그리고 5월 광주에선 그 일이 일어난다.
동호가 보는 앞에서 정대는 실탄이 옆구리에 꽂히고,
그런 정대를 부축하러 튀어나가던 동호는
옆에서 몸을 피신하며 비슷하게 동료가 죽어가는 것을 보던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는다.
하지만 그 동호의 죄책감은
희생자를 수습하고 시체를 닦고 유가족들에게
희생자를 찾을 수 있게 돕는 일을 하게 만든다.
전남대 강당에 태극기에 쌓여 놓여있는 시체들,
시체 냄새를 없애고 얼굴을 쉽게 확인하게끔
음료수 병에 양초를 꽂아 불을 밝혀 시신 옆에 놓는다.
그리고 거기엔 주도적으로
총에 맞아 죽어가는 부상자들,
치명적인 부상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희생자들을 직접 나르고
군부에 대항하며 마지막까지
도청건물에 남아있던 김진수도 있었다.
언젠가 김진수는 나에게 말했습니다.
꼭 죽이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어, 형.
아직 완전히 취하지 않은
그의 검고 깊은 눈이 나를 응시했습니다.
언제가 됐든 내가 죽을 땐,
그 사람들까지 꼭 데리고 갈 생각이었어.
잠자코 나는 그의 잔에 술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아. 지쳤어.
형, 하고 그는 다시 나를 불렀습니다.
맑은 술이 담긴 유리잔을 내려다보며,
마치 내가 그 속에 있어 말을 거는 것 처럼
고개를 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총을 들었지,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그에게 대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게 우릴 지켜줄 줄 알았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일에 익숙한 듯, 그는 술잔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하지만 우린 그걸 쏘지도 못했어.
-쇠와피, 126p-
계엄이 선포된 날 저녁, 항복하고 투항하라는
정부군의 명령 아래 전남도청을
둘러싸고 무장했었던 시민들 중 한 명이었던
김진수는 수 달 동안 감옥생활을 하며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위의 '형'도 김진수와 한 뜻으로 마지막까지
항복하지 않았던 시민군 중 한 명이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재판도 마무리 되고
각각 9년 형, 7년 형을 선고받은
그들이 기간을 다 채우지 않고 풀려났음에도
그들의 마음은 아직도 그 날에 멈춰있다는 것을
작가는 보여준다.
그리고 그 안에는 성인이 되지 않은 아이들도 있었다.
동호도 거기에 있었다.
다락 안에 숨어 계엄군에게 항복을 하게 되면
군 소리 없이 손을 들고 줄을 맞춰 나오기로
형들과 약속했던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작은 아이들.
계엄군에게 결국 총을 쏘지 못했던
시민군들이 두 손이 결박되어 무릎을 꿇고 있는 동안
그 다섯명의 어린 학생들은 줄을 지어 나오다
계엄군의 총알에 그자리에서 전부 즉사한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것이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중략)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쇠와피, 135p-
김진수는 풀려나 10년 뒤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남아있는 사람도, 떠난 사람도
고통속에서 지내야했었던 과거, 현재, 그리고 남은 미래.
이 책에 실린 모든 문장은 구슬픈 효과음을
배경에 깔아놓은 것처럼 슬프고 아프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장, '꽃 핀쪽으로'는
다시 읽고 읽어도 답답한 한 숨이 몸에 가득차게 만든다.
동호의 엄마는 계엄 선포 날
전남도청에서 동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작은형과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그 날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동호의 작은 그 무엇도 잊을 수가 없다.
네 중학교 학생증에서 사진만 오려갖고
지갑 속에 넣어놨다이.
낮이나 밤이나 텅 빈 집이지마는
아무도 찾아올 일 없는 새벽에,
하얀 습자지로 여러번 접어 싸놓은 네 얼굴을 펼쳐본다이.
아무도 엿들을 사람이 없지마는 가만가만 부른다이.
....동호야.
가을비가 지나가서 하늘이 유난히 말간 날엔
잠바 속주머니에 지갑을 넣고,
무릎을 짚음스로 절름절름 천변으로 내려간다이.
코스모스가 색색깔로 피어 있는 길,
동그랗게 똬리를 틀고 죽은 지렁이들에 쇠파리가
꾀는 길을 싸묵싸묵 걷는다이.
네가 여섯살, 일곱살 묵었을 적에,
한시도 가만히 안 있을 적에,
느이 형들이 다 학교 가버리먼
너는 심심해서 어쩔 줄을 몰랐제.
너하고 나하고 둘이서,
느이 아부지가 있는 가게까지 낢다 천변길로 걸어갔제.
나무 그늘이 햇빛을 가리는 것을 너는 싫어했제.
조그만 것이 힘도 시고 고집도 시어서,
힘껏 내 손목을 밝은 쪽으로 끌었제.
숱이 적고 가늘디가는 머리카락 속까장
땀이나서 반짝반짝함스로.
아픈 것맨이로 쌕쌕 숨을 몰아쉼스로.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꽃 핀쪽으로, 192p-
작가는 열 살 정도까지 광주에 살았다.
책을 전부 읽고 알게 된 사실인데
(살았던 시간이 길진 않았지만,
이 책을 집필하는데는 영향을 준 것이 확실하다)
작가가 광주를 떠날 때 그 집에 이사온 아이는
그 사건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 책에서 담지 못한 수 많은
사건들을 보고 듣고 읽으며 작가는
눈물과 피로 쓴 소설을 내놓는다.
작가가 이 책을 쓰기로 한 후
여타 다른 집필 활동을 하지 않은 채
이 사건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두 달 동안 보고나선
군인이 명치를 누르는 꿈을 계속 꾸기도 했다고 한다.
마음이 먹먹해 읽기 힘든 글들을 쓰려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자신의 마음을 투영해야 하는지
'범접할 수 없을만큼 힘든 작업이겠지' 라고 생각해본 소설은 이 작품이 처음이었다.
말이 두 달이지 수도 없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고 읽었겠지.
후유증으로 가득한 음성, 당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울음,
아직도 그 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
시집도 몇 권 내었던 작가라
시처럼 표현한 문장들이 더욱 인상적이다.
내가 좋아하던 신형철 작가가 이 책의 추천글을 썼다.
'5월 광주에 대한 소설이라면
이미 나올 만큼 나오지 않았냐고,
또 이런 추천사란 거짓은 아닐지라도
대개 과장이 아니냐고 의심할 사람들에게,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둘 다 아니라고 단호히 말할 것이다.
이것은 한강을 뛰어넘은 한강의 소설이다.'
그리고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다. 정말 추천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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