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31. 11:45ㆍ무한취미/독서
아마 김민철 작가님의 책을 읽으면서
충실한 마음이라는 책의 한 구절을 스치듯 봤다.
한 단락 이었지만 깊이가 있었고
꼭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생일이었고, 마침 생일선물을 깜빡해준 동기가 있어서
바로 이 책을 생일선물로 갖고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우연치않게 다가온 책, 다른 것보다
2021년에 산 책들 중 가장 예쁘다.
책의 크기와 표지 어느것 하나 빠짐 없이 단정하다.
미적감각이 뛰어난편이 아니라 책의 외모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네!
책 표지에 그려진 빛에 따라
반짝거림이 달라지는 돌(광물)처럼
단단하고 충실한 마음이나
삶을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태도에 대해
담고 있는 것 같지만 책 내용은 제목과 표지와는
다른 슬프고 어쩔 줄 몰라하는 주인공들의 마음을 말한다.
1. 테오가 부모에게 - 어쩔 수 없는 충실함
테오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부모는 테오가 4살 때 이혼해
일주일마다 테오는 엄마와 아빠집을 왔다갔다하며 지낸다.
엄마는 아빠집에 다녀온 테오가 아빠의 버릇을 닮았다며
자기의 전남편을 혐오하듯 아들을 바라보고,
테오의 아빠는 약물 중독으로
아이를 거의 방치하다시피하기 때문에
테오는 어느 곳에서도 보호다운 보호를 받을 수 없다.
그는 학교에서도 마음을 드러내고 이야기하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것은 약물중독 아빠를
사회로부터 지키려는 충실함때문이다.
담임선생님한테 말했다간,
마티스의 엄마에게 아빠의 상태를 들켰다간
그래도 나를 보고 웃음을 지으려고 노력하는
아빠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이혼 후 새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자기를 돌보는 엄마에 대한 충성심이기도 하다.
잔인하고 마음아픈 내용, 하지만 만 13살이 안된 아이에게는 입을 꾹 다무는것 이상으로 충실함을 드러낼 방법이없다.
'하지만 테오는 다른 것을 원한다.
그는 뇌를 일종의 대기 모드 상태로 유지시키고 싶다.
무의식의 상태.
그에게만 들리는, 난데없이 밤에 들리기도 하고
때로는 벌건 대낮에도 들리는 그 날카로운 소리가
끝내 멈추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피에 4그램의 알코올이 필요하다.
그의 나이라면 조금 적어도 상관없으리라.
인터넷에서 읽은 정보에 따르면 뭘 마시느냐,
얼마나 빠르게 마시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알코올성 혼수상태. 그런 이름으로 부른다고 한다.
그는 이 단어들을 좋아한다. 그 소리를, 약속을 좋아한다.
그 누구에게도 빚진 것 없이 사라지는 순간,
어김없이 지워지는 순간이라는 약속.
하지만 매번 그 순간에 다가갈 때마다,
그는 마지막에 이르기 전에 전부 게워내곤 했다.'
- 테오, 145쪽 -
2. 테오를 발견한건 그녀의 무의식이다 - 엘렌
엘렌은 취하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폭력을 휘두르는 방식은
언뜻보면 정당성을 가진 체벌같기도 하다.
아버지 스스로가 납득하려고 만들어놓은 정당성, 퀴즈를 맞추지 못하면 맞아야한다.
상금을 타는 TV 퀴즈쇼에서 나온 질문들에 대답하지 못하면 참가자는 단지
상금을 받지 못하지만 엘렌은 그 순간부터 발로 배를 차이는 무차별적인 폭력을 당한다.
(그 학대의 영향으로) 엘렌은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결혼, 연애에 생각이 없으며
학교의 기혼자 선생님 프레데리크와 교류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테오가 정신이 딴데 있다는 것을 안다.
다른 선생님들은 공부를 곧잘하고 조용한 아이가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냐고
엘렌을 나무라지만, 엘렌은 재차 테오의 어머니를 학교에 불러야하며, 가정문제가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고 교장선생님 앞에서 말한다. 테오의 말못할 충실함을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테오가 알코올중독이라는 것을 알아내진 못하지만 쓰러졌을 때 부축해줄 단 한사람이 된다.
'밤에 잠에서 깨면, 종종 같은 질문이 되풀이된다. 왜 나는 아무 말도 못했을까? 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어떤 도움도 요청하지 않은채 '행운의 원판'이 돌아가게 두엇을까? 아빠가
퀴즈와 함정과 발길질을 늘려갈 때 왜 나는 가만히 있었을까? 왜 나는 소리치지 못했을까?
왜 아빠를 고발하지 못했을까?
자 엘렌, 집중해라. 이제 역사 문제야, 아니 심리학에 가깝군. 왜 너는 입을 다물고만 있지?
정말 유감이구나 엘렌, 판돈을 배로 올릴 수있었는데.
하지만 결국 나는 그 이유를 알아낸다.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를 보호한다. 그 무언의 약속은 때때로 아이들을 죽음으로 이끈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무언가를 이제 나는 안다. 그래서 모르는 체 할 수가 없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어른이 된다는 게 고작 이런거구나. 잃어버린 것들과 잘못 끼운 첫 단추를 손보는 것.
그리고 우리가 어렸을 때 했던 약속들을 지키는 것.'
- 엘렌, 168쪽 -
3. 세실과 마티스, 나에게 소중한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다짐
세실의 남편 윌리엄은 화이트칼라의 표본으로
위트있고 책임감 있는 회사원이다.
하지만 마티스를 낳고 시간이 지나면서
윌리엄은 혼자 서재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느날 세실은 윌리엄의 방에서 우연찮게
키보드 워리어(악플러)로 여성, 호모, 사회의 여러 약자들을
무자비 하게 비난하는 윌리엄의 모습을 본다.
윌리엄에게 몇 번 드러낼까 생각했지만
세실은 마티스의 음주와 윌리엄의 컴퓨터에서
본 것들을 수면위로 드러내지 않는다.
가정의 충실함을 깨고싶지 않아서.
대신 세실은 혼잣말을 하기 시작하고
정신과 의사(타인)에게 이 문제를 말할 수 밖에 없다.
마티스는 테오와 함께하고 싶다.
수의사가 되고 싶은 꿈이 있지만
테오를 혼자 내버려두고 술을 먹게끔 하고 싶진 않다.
테오네 아빠 집에도 다녀온 적이 있지만
엄마한테 알리고 싶진않다.
그러면 엄마가 테오를 더 싫어할 것이 뻔하니까.
그래서 술을 마실 때도,
공원에서 테오가 쓰러졌을 때도 마티스는 경찰이 아닌 엘렌에게 테오를 맡겼다.
우리는 각자 충실하게 살아간다. 어떤 종류의 충실함인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충실함일수도 있지만
그게 옳다고 생각하고 꾸준하게 충실하다.
책 주인공들의 선택을 보면 아이들과 어른들의 충실함이 어디에 포커스를 두는지 알 수 있다.
독자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충실함이지만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그게 최선이다. 반향을 일으키지 않고 현 상태에 충실할 것.
나는 과거로부터 무엇에 충실하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하지 않을까,
이런말이 하고 싶어도 참고, 저런말이 하고 싶어도 다른 방법을 찾을까?
이제부터라도 어떤 선택을 할 때 나에게 물어보고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질문이 되지 않을까 싶다.
충실한 마음
다른 이들 - 살아 있든 죽었든 - 에게 우리를 묶어두는 보이지 않는 끈.
속삭였으나 그 반응을 알 수 없는 약속, 무언의 충성,
대부분 자기 자신과 맺은 과거의 다짐, 들은 적 없지만 따라가야 하는 명령, 기억의 주름 속에 숨겨둔 빚.
몸속 어딘가 잠들어 있는 어린 시절의 법칙, 우리를 바로 서게 하는 가치, 저항하게 하는 근거,
우리를 갉아먹고 가두는, 해독할 수 없는 원칙.
우리의 날개이자 굴레
우리의 힘이 펼쳐지는 발판, 그리고 꿈을 묻어둔 참호.
- 책의 1장 중-
'무한취미 >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리뷰] '길 위의 소녀' / 프랑스 소설 추천 / 청소년 소설 추천/ 델핀 드 비강 지음 (0) | 2021.11.07 |
---|---|
[책리뷰]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스미노 요루/일본소설추천 (0) | 2021.11.01 |
[책리뷰]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밀라논나 장명숙 작가의 삶/'어른'을 재정의하다 (0) | 2021.10.28 |
[책리뷰] 아내 대신 엄마가 되었습니다/ 사유리와 젠의 이야기 / 정자기증, 비혼 출산, 싱글맘의 모든 것 (0) | 2021.10.22 |
[책리뷰] 재일교포의 삶, 이민호, 윤여정 주연 드라마 원작 - 디아스포라 소설 '파친코' / 작가 이민진 (0) | 2021.09.14 |